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 포트 (문단 편집) === 최후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repubblica.it/5gra.jpg|width=100%]]}}} || || {{{#fff '''[[1998년]] 1월 4일(사망 약 3개월 전), 인터뷰에 응하는 폴 포트'''}}} || 그러던 중 1997년 6월 10일 밤에 폴 포트의 최측근이자 민주 캄푸치아의 국방부장인 [[손 센]] 일가가 참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손 센은 휴대전화로 캄보디아 정부의 [[훈 센]]과 은밀히 교섭을 했는데, 폴 포트가 이 사실을 알고 배신자라 하여 부하들에게 손 센 일가를 총살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를 받은 병사들은 같은 날에 손 센과 윤 얏, 다른 가족들 12명[* 미성년자 9명 포함. 이들 중에는 '''젖먹이 손자'''도 있었다고 한다.]을 모두 총살했다. 손 센은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으며, 이 날 총살된 시신들은 픽업 트럭으로 깔아뭉개졌다. [[따 목]]은 폴 포트가 그의 오른팔이었던 손 센을 살해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위험하다고 생각해 1997년 7월 25일 돌연 손 센 일가 살해죄로 폴 포트를 구속해 인민 재판에 회부하여 종신형을 선고했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폴 포트는 산 중턱에 있는 조잡한 헛간에 연금되었다. 당시 증언으로는 폴 포트의 후처와 경호원, 키우 삼판의 아내가 폴 포트의 시중을 들었지만 폴 포트는 이미 뇌졸중으로 왼쪽 몸이 마비되고, 심각한 심장 질환과 고혈압을 앓는 데다 암에 걸린 몸이었다고 한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 폴 포트는 부하들의 질책에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죽기 반년 전인 1997년 10월 16일에 미국인 기자 네이트 세이어(Nate Thayer, 19602023)와 한 인터뷰에서조차 그는 "나는 투쟁을 수행했을 뿐 사람을 살해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라, 내가 야만인으로 보이는가. 내 양심은 깨끗하다.", "75~80년의 통치기간 중 우리의 운동이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이는 베트남 침공으로부터 캄보디아와 국민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었으며 나는 투쟁을 수행한 것이다."라며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죄를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피해자 코스프레|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했다.''' [[http://edition.cnn.com/WORLD/9706/18/cambodia/index.html|폴 포트 항복]] 게다가 폴 포트는 그밖에 정적에 대한 학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주장했고, '오랜 적인 베트남의 지배에서 캄보디아를 구했다'는 말도 남겼다. 그리고 폴 포트에게 악명 높았던 '뚜올 슬렝'을 물어 보자 그 고문소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인했고, 아사 등을 포함한 대량학살은 모두 베트남과 친베트남 정부 측이 주도했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다만 폴 포트의 축출을 야기했던 손 센 가족 살해 사건에 대해 폴 포트는 자신이 처형을 명령했다고 시인했으나 "손 센과 그 가족만의 처단을 명령했을 뿐 어린애들까지 죽이라고 하진 않았다"고 주장했다.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politics/1997/10/23/pol-pot-admits-mistakes-by-his-regime/f00697a6-8178-484f-b53f-e571807c7cef/|자료]] 그러던 중 1998년 3월 [[케 팍]]과 [[픽 체앙]] 등이 크메르 루주 잔당에서 이탈하였다. 동년 4월에는 [[빌 클린턴]] 행정부가 폴 포트를 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해 재판을 받게 할 방침을 밝혔고, 캄보디아 정부군의 공격이 심해지는 가운데 간부 중에는 폴 포트를 미국에 인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당시 폴 포트는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상태였는데, 크메르 루주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는 중이었던 탓에 태국으로 도망칠 준비를 했던 때문이라고도 하나, 따 목이 폴 포트를 태국 난민캠프를 경유해서 미국에 넘길 요량으로 위장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폴 포트는 대단히 쇠약해져 있었지만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폴 포트는 1998년 4월 16일에 구금장소로 이동할 것이 예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예정 날짜로부터 하루 전인 1998년 4월 15일에 폴 포트는 잠을 자는 중에 [[심부전]]으로 급사해버렸다.[* 이원복 교수 학습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 걸로 되어 있으나, 작가 창작으로 보인다. 다만 죽기 전까지 끝까지 자신이 정당했다고 믿었던 그의 모습을 보면 나름 납득되는 해석이긴 하다.] 어쩌면 잔혹하게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빠져 죽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망 당시 정황이 석연치 않아 온갖 반인륜적 범죄의 책임을 전부 폴 포트에게 떠넘기려던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에 의해 살해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인터뷰를 하러 찾아갔다가 그가 죽은 직후 부인과 대화한 세이어는 폴 포트 본인의 부탁으로 부인이 [[발륨]]과 [[클로로퀸]] 혼합물에 의한 음독 자살을 도와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시신은 얼음과 포름알데히드로 보존돼 기자들이 장례식을 보러 올 수 있도록 했다. 태국 법의학 전문가들은 지문과 치과 사진, 머리카락 샘플 등을 채취했다. 한 미국 특파원이 신원 확인을 위해 치아 하나를 제거하기를 원했다. 많은 크메르 루주 간부들은 폴 포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옛 지도자와 연루될까 두려워 모른체 했는데, 옛 부하들은 외딴 시골에 폴 포트의 시체를 들고 가 폴 포트의 가족들과 옛 정권의 2인자였던 [[누온 찌어]]가 보는 앞에서 폴 포트의 장례식을 불교풍으로 치렀다. 이때 폴 포트의 부하들도 폴 포트를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하게 되었는지 이들은 옛 상관의 시신을 '''[[인과응보|동네에 굴러다니던 폐타이어와 쓰레기와 함께 화장해 버렸다.]]''' 이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장례식이 놀랄 정도로 불결했다며 놀랐는데, 실제로 폴 포트를 가택연금시킨 따 목은 캄보디아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폴은 이제 끝났다. 권력도 없고, 자격도 없는 소의 배설물에 불과하다. 아니, 폴은 소의 배설물만도 못하다. 적어도 소의 배설물은 거름으로는 쓸 수 있으니. 따 목은 크메르 루주의 집권 전부터 민간인 학살을 명령, 자행하며 도합 10만 명 이상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며, '''직접적으로''' 살상 행위에 가담하여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는데 그렇게 잔혹한 사람마저도 이런 말을 남겼을 정도니 폴 포트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인망을 잃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다만 따 목은 상술한 네이트 테이어와의 인터뷰를 할 시점에는 어느 정도 심정이 바뀌었는지 "폴 포트가 인류에 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미국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다."라며 어느 정도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6eafbf5bd25377503538e9fb3901f415678f4b9909964095c5e7f5a4995ee09d.jpg|width=100%]]}}}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raf_pol_pot.jpg|width=100%]]}}} || || {{{#fff '''폴 포트의 장례식'''}}} || {{{#fff '''2007년 7월 3일에 촬영된 폴 포트의 묘지'''}}}[* 위에는 '폴 포트는 여기서 화장되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 장례식에 참여한 폴 포트의 후처와 딸은 폴 포트에 대해 '세상이 뭐라고 말하든, 우리에게 있어서 그는 상냥한 남편이며, 아버지였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폴 포트의 묘지는 매장 한참 후에야 세워지게 되었고 원래는 건물도 세워져 있었다지만 누군가가 파괴했다고 전해진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폴 포트가 죽자 그의 만행을 직접 겪은 캄보디아 내부 여론은 그야말로 "천수 누리게 해준 것만으로도 화딱지 난다." 수준으로 험악했으며[*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나온 위살봇에 의하면 폴 포트의 편안한 죽음을 듣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다들 원통해 했다고 하며 심지어 사망하기 전 캄보디아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에게 폴 포트를 사형시키라는 상소문을 매년 올렸을 정도였다.] 그 어느 누구도 추모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심지어 킬링필드를 경험한 캄보디아인들은 지금까지도 폴 포트의 무덤에다가 오줌을 싸거나 침을 뱉는 등 모욕적인 처우를 하고 있으며 폴 포트의 폴 자만 나와도 '역적', '조국을 파괴한 쓰레기'라는 욕을 퍼붓는다고 한다.[* 여담으로 뚜얼슬랭 박물관에 가면 관련자 사진들 중 하나로 폴 포트 사진이 걸려있는데 이미 전시되기 전부터 '''눈 부분이 파여있는''' 상태였던 걸 알 수 있다. [[https://www.alamy.com/the-portrait-of-pol-pot-on-the-wall-at-the-choeung-ek-memorial-also-known-as-the-killing-fields-phnom-penh-cambodia-image355203487.html?imageid=71E323C7-9D4A-4E2A-8B5B-244FA98D1715&p=5481&pn=1&searchId=a8676a0dbce0d845094fca41f5d0f3c6&searchtype=0|실제 모습]] 잘 보면 사진 속 눈이 파여 있을 뿐만 아니라 사진 일부가 찢어져있고 얼굴 부분에 의도적인 낙서가 가득 차 있다.] 폴 포트의 사망 이후 크메르 루주 시대는 막을 내렸다. 크메르 루주 라디오 방송은 중단되었고 직원들은 태국 난민 캠프로 피신했다. [[키우 삼판]] 등을 비롯한 크메루 루주들은 내전에서 패배하고 1998년 12월 누온 찌어와 키우 삼판은 투항했으며, 1999년 3월 따 목 총참모장이 생포되면서 결국 모든 크메르 루주의 지도부 세력들은 체포되었고, 2007년부터 [[이엥 사리]], [[누온 체아]], [[키우 삼판]], [[이엥 티릿]], [[깡 겍 이우]]가 [[캄보디아법원특별법정]](ECCC)에 회부되었으며, 재판 중에 사망한 이엥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3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고, 이후 누온 찌어와 깡 겍 이우가 각각 2019년/2020년에 옥사하면서 당시의 크메르 루주 최고위층은 [[키우 삼판]] 전 국가주석 한 명만이 아직 살아있는 셈이다. 한편, 폴 포트의 미망인은 1998년 5월 폴 포트의 비서였던 텝 쿤날(Tep Khunnal)과 함께 말레이시아로 간 후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폴 포트의 딸은 사 파차타(Sar Patchata)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말레이시아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딴 후 2014년에 시 비체카(Sy Vicheka)라는 크메르인 남성과 결혼한 후 캄보디아 북서부의 반띠 메안체이(Banteay Meanchey) 지방에서 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파차타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아버지를 위해 자주 기도하고 '다음 생이 있다면 다음 생에 아버지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 다만 그녀는 아버지가 퇴진한 후에 태어나 아버지의 악행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은 감안해야만 할 것이다.[* 아버지가 처형될 당시 고작 7살이라 아버지의 만행과는 전혀 관련이 없이 살았던 [[마시아스 응게마]]의 딸 모니카와 어떻게 보면 비슷한 케이스인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